A Roman fresco of a ship with a bound figure lashed to the mast and oarsmen rowing past a rocky islet where two Sirens perch, a distant shrine on the horizon

소식 에세이

육신을 입은 에이돌론

마침내 본 놀런의 《오디세이》

이 글은 존 선생님이 영어로 쓴 에세이를 한국어로 옮긴 것입니다. 원문 보기(영문) →

지난 6월,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는 공들여 고른 2분짜리 예고편 말고는 아직 한 장면도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이 지면에서는 이 영화가 호메로스의 시를 어떻게 다룰지를 두고 몇 가지 우려를 적었다. 이번에도 학생들의 질문에서 시작된 우려였고, 성의를 다해 답한 글이었다. 그러나 예고편은 상품 광고이지 비평판 원전이 아니어서, 예고편 하나로 정직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이제 영화를 보았으니 비로소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판단을 말하기 전에, 내가 어떤 자세로 극장 좌석에 앉는지부터 밝혀 두는 것이 옳겠다. 나는 영화의 이음매를 찾아 헤매기보다 영화가 나를 휩쓸고 지나가도록 두는 편이다. 관객을 인물과 이야기 속에 푹 잠기게 하는 영화라면, 나중에 세미나에서 어떤 트집이 잡히든 제 몫을 다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 무언가를 가르치고 깨우쳐 주기까지 한다면, 그보다 드문 일을 해낸 셈이다. 두 번, 세 번 다시 볼 때마다 같은 즐거움과 더 깊은 이해를 주는 작품 말이다. 이 기준으로 보아도, 개봉 전에 찬사와 비난이 반반씩 쏟아지던 숱한 말들과 견주어 보아도, 놀런의 《오디세이》는 성공했다. 그것도 2분짜리 예고편으로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온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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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감이 IMAX 촬영 덕분인지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눈은 웅장한 화면에 금세 익숙해져 더는 의식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소리다. 루드비히 고란손의 음악은 일찍부터 찬사를 받았는데, 그 찬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귀로 경험하는 이 영화의 두 대목이다. 포세이돈이 오디세우스의 배들을 산산조각 내는 폭풍, 그리고 세이렌 곁을 지나는 장면이다. 폭풍 장면은 예상한 그대로 원초적이고, 관객을 집어삼킬 듯하다. 더 흥미로운 선택은 세이렌 쪽이다. 다른 감독이라면 아리아를 골랐을지 모른다. 오디세우스를 끌어당기듯 관객도 바위 쪽으로 끌어당기는, 황홀한 오페라 목소리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세이렌은 낮은 소리를 길게 낸다. 선율이라기보다 한 음을 끌고 가는 저음 드론에 가깝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쪽이 더 호메로스다운 선택이다. 호메로스의 세이렌이 위험한 이유는 노래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진짜 미끼는 모든 것을 알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다. 지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과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끝까지 들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자에게 펼쳐 보이겠다는 약속. 드론은 귀를 꾀어내는 대신 귀를 짓누른다. 아름다움보다는 확신에 기댄 유혹에 더 가깝다. 그리고 확신이야말로, 쉬지 않고 답을 찾는 정신 하나가 미덕의 전부인 사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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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에 맡길 수도 있었던 일을 소리에 맡기는 그 절제는 연기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다시 볼 가치가 있는 순간을 하나만 꼽으라면 서맨사 모턴의 키르케다. 모턴은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어야 할 배우다. 특히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맡은 애거사가 떠오른다. 애거사는 살인을 미리 내다보는 예지자로, 그 예지 때문에 무고한 남자가 하마터면 유죄 판결을 받을 뻔하지만 결국 애거사의 증언으로 누명을 벗는다. 고요함 속에 엄청난 힘을 품은 역할이었다. 키르케 역은 거의 정반대를 요구한다. 키르케는 사람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힘과 잔인함을 지닌 여인이다. 처음에는 위협으로 보이지만, 차츰 상처가 남긴 흔적으로 이해된다. 영화가 내준 짧은 시간 안에, 모턴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바꾸는 행동을 상처에 상처로 되갚는 일로 읽히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억울함을 늘어놓는 말로 설명하려 드는 일은 한 번도 없다.

카메라는 관객이 스스로 연민에 이를 때까지 키르케의 얼굴에 오래 머문다. 연민을 드러내 놓고 말해 주는 것보다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변신 장면, 곧 사람이 돼지가 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과정도 디지털 효과가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모턴의 손짓과 표정으로 전달된다. 그 절제는 제값을 한다. 이 장면은 보여 주지 않는 것 때문에 더 섬뜩하다. 모든 것을 다 보여 주는 화려한 장면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섬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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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를 믿는 태도는 괴물들에게도 이어진다. 괴물은 어느 하나도 무섭게 보이려고 새로 지어낼 필요가 없었다. 폴리페모스, 스킬라, 카리브디스, 라이스트리고네스족까지, 시에 나오는 주요 괴물은 모두 등장한다. 라이스트리고네스족 장면은 엄밀히 말해 호메로스가 쓴 그대로의 일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원전에 없는 장면이라는 이유로 영화 전체의 설계가 누구에게 빚을 지는 것은 아니다. 시인에게 시적 자유가 허락되듯 영화감독에게도 같은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귀향길에 겪는 시련은 호메로스 이래 누가 이야기하든 조금씩 살이 붙어 왔다. 중요한 것은 전체 설계가 하나로 맞물려 있느냐이고, 이 영화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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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설계의 모양은 시간을 다루는 놀런 특유의 본능에서 나온다. 영화는 오디세우스의 10년을 트로이 함락에서 칼립소의 섬으로, 다시 무너져 가는 이타카의 집안으로 차례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세 시간대를 한데 엮어, 관객이 세 갈래 시간을 한꺼번에 머릿속에 붙들고 있어야 하는 절정으로 나아간다. 《메멘토》 이래 《프레스티지》,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까지 놀런의 작품을 관통해 온 바로 그 본능이다. 이 영화들에서 시간은 이야기를 담는 그릇에 그치는 일이 드물고, 대개 이야기의 진짜 주제가 된다. 여기서 이 장치는 줄거리를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참으로 호메로스다운 무언가를 그려 낸다. 20년 동안 집을 떠나 있던 사내에게 시간은 고르게 흐르지 않는다. 자꾸 제자리로 되돌아오고, nostos(귀향)가 마침내 이루어질 때까지 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한다.

영화 속에서 칼립소와 보낸 세월은, 연꽃 열매를 먹은 듯한 망각에 오디세우스가 빼앗긴 세월이다. 기억은 무뎌지고 정체성은 표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distentio animi, 곧 기억과 주의와 기대 사이로 늘어난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이 설명을 빌리면 이런 상태가 왜 하필 오디세우스에게 그토록 위험한지 알 수 있다. 자아가 그렇게 늘어난 정신을 하나로 붙들어 둔 것일 뿐이라면, 기억을 잃는 것은 과거의 사실 몇 가지를 잃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통째로 풀려 흩어지는 일이다. 더 까다로운 반론은 니체가 내놓는다. 영화는 그 반론을 한동안 대답 없이 세워 둘 만큼 참을성이 있다. 니체는 역사가 삶에 주는 이로움과 해로움을 다룬 글에서, 기억이 지나치면 다른 무엇이 지나칠 때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것을 해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망각, 곧 자아를 감싸 앞을 가리는 행복한 구름이 있어야 비로소 행동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이렇게 읽으면 칼립소가 내미는 것은 무언가를 빼앗는 일이라기보다, 견디기 어려운 기억을 잊게 하는 마취제에 가깝다. 물에 빠져 죽고, 불에 타고, 잡아먹히고, 짐승으로 변한 부하들의 기억 말이다. 오디세우스는 끝내 그 마취제를 거절하고, 망각이 주는 안도 대신 기억의 짐을 택한다. 바로 그 선택 덕분에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생존자가 아니라, 누가 보아도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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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디세우스가 누비는 세계는 개봉 훨씬 전부터 나름의 논란을 불렀다. 논란은 대부분 다국적 캐스팅에 쏠렸다. 헬레네 역의 루피타 뇽오, 인도와 일본을 비롯해 에게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병사들, 에우마이오스 역의 존 레기자모가 그 대상이었다. 반대하던 쪽이 스스로 이렇게 분명히 말한 적은 드물었으니, 짚어 둘 만한 점이 있다. 안티노오스 역의 로버트 패틴슨이나 텔레마코스 역의 톰 홀랜드에게는 그만한 분노가 쏟아지지 않았다. 두 배우 모두 비난받은 배우들보다 조금도 더 그리스인이 아닌데도 말이다. 영국은 오랫동안 영화 속 고대 세계에 배우를 대 주는 기본 공급처였다. 그 정도가 워낙 철저해서, 영국 억양으로 호메로스의 대사를 읊으면 중립적으로 들리지만 다른 억양은 거의 모두 해명이 필요한 선택처럼 들린다. 캐스팅을 두고 이렇게 반응이 엇갈렸다는 것은, 그 반대가 근본적으로는 역사적 고증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고대 이타카에는 영국 표준 발음도 없었다.

같은 캐스팅 밑에는 더 흥미로운 질문이 깔려 있다. 영화 내내 여러 인물이 제우스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에 관한 질문이다. 그 맹세가 불러내는 것은 xenia, 곧 손님과 주인 사이의 유대다. 제우스는 '크세니오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이 유대를 몸소 지켜 주는 신으로 여겨졌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이것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시의 중심 도덕률에 가깝다. 구혼자들의 죄는 이 법을 송두리째 짓밟은 데 있다. 자기 것이 아닌 집을 눌러앉아 차지해 버린 손님들이다. 폴리페모스는 반대 방향에서 같은 법을 어긴다. 보호해야 할 손님을 잡아먹는 주인이다. 여섯 대륙에서 모인 배우들이 고대 그리스라는 특정 사회의 약속에 묶인 맹세를 진정으로 함께 나눈다고 볼 수 있는지는 물어볼 만한 질문이다. 다만 이 질문에는 답이 이미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xenia가 그려 내는 것은 그리스만의 특수한 관습이라기보다 인간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문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문 앞의 낯선 이를 손님으로 맞을 것인가, 먹잇감으로 붙잡을 것인가. 이 시는 낯선 이가 어디서 왔든 이 법을 지켜야 한다고 늘 말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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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우들이 받은 각본이 에밀리 윌슨의 2017년 번역에 빚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 추측이 아니다. 놀런은 맷 데이먼의 오디세우스를 만들 때 윌슨 번역의 첫 행 「복잡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 다오」를 길잡이로 삼았다고 《엠파이어》에 직접 밝혔다. 그 흔적은 데이먼의 연기 곳곳에서 읽힌다. 웅변하듯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똬리를 튼 지성, 밖으로 내보이지 않고 안에 꼭 붙든 복잡한 속내가 그렇다. 데이먼은 이 오디세우스에게 진짜 hamartia(비극적 결함)를 부여한다. 호메로스도 끝내 오디세우스에게서 완전히 거두어 가지 않는 결함이다. 시 속의 오디세우스는 떠나는 배 위에서 폴리페모스를 조롱하는데, 이 장면은 유명하고도 치명적이다. 영화의 오디세우스는 그렇게 조롱하지 않는다. 대신 눈먼 괴물을 화살로 자극해, 끝내 참지 못한 몸짓 하나로 부하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원작에서 살짝 비켜 간, 잘 고른 변화다. 그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영리함이 이따금 무모함으로 변하는 사내의 진실은 지켜 낸다. 또 이 오디세우스가 부하들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느낌도 잃지 않는다. 부하 몇몇이 속으로 그를 어떻게 의심하든 말이다.

언어를 다루는 이런 세심함이 모든 배우에게 고르게 미치지는 않는다. 둘 다 잉글랜드 출신인 패틴슨과 홀랜드는 미국식 말투에 무리 없이 녹아들어 한 번도 거슬리지 않는다. 영국 배우가 미국 억양을 소화하는 편이 미국 배우가 영국 억양을 소화하는 것보다 대체로 자연스럽다는, 익히 알려진 이야기 그대로다. 아쉬운 쪽은 앤 해서웨이의 페넬로페다. 발칸풍, 어딘지 루마니아풍이 감도는 억양이 자꾸 귀에 걸린다. 그것도 페넬로페의 슬픔과 지략이 아무 방해 없이 전해져야 할 바로 그 순간마다.

윌슨의 관여에는 후일담이 있다. 놀런이 윌슨의 첫 행을 끌어올 때는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윌슨은 그 뒤 완성된 영화를 두고 공개적으로 평가를 내놓았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이 각본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내가 썼다면 부끄러웠을 것"이라고 쓰고, 자신의 번역이 6년에 걸쳐 호메로스의 인물들에게 되찾아 주려 한 심리적, 윤리적, 정서적 깊이가 각본에 없다고 비판했다. 다른 자리에서는 같은 불만을 다른 각도에서 제기했다. 시의 오디세우스는 그토록 많은 것을, 그토록 구체적으로, 그토록 인간적으로 원하는데, 이 오디세우스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느냐고 날카롭게 물었다. 여기에는 진짜 아이러니가 있다. 우쭐대지 말고 조용히 곱씹어 볼 만한 아이러니다. 한 감독이 영화의 첫 대사에 무게를 싣고자 한 번역가의 권위를 빌렸다. 그 번역은 이 영웅의 내면이 앞선 여러 세대의 번역 속에서 납작해졌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번역이었다. 그런데 감독은 바로 그 번역가에게서, 당신의 영화가 그 내면을 또다시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윌슨은 영화가 끼친 더 넓은 영향에는 너그러웠다. 각본에는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이 영화가 관객을 서점으로, 호메로스에게로 다시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어 가야 할 것은 그 너그러움인 듯하다.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영화가 세상에 좋은 일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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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에 이를 무렵, 이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보다 테니슨의 율리시스에 더 가까이 서 있다. 테니슨의 시 속 율리시스는 늙은 몸으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20년 동안 피 흘리며 닿으려 했던 바로 그 평화 속에서 좀이 쑤시는 인물이다. 그는 분투하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가슴을 뛰게 하는 정서이지만, 호메로스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이 세상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방랑을 멈추고 그저 집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놀런의 영화는 청동기 시대의 영웅보다 19세기의 영웅 쪽으로 기운다. 싸워서 되찾은 왕좌에 편히 앉는 것 못지않게 쓰러진 동료들을 기리는 사내다. 이것이 접목, 곧 다른 가지를 덧붙인 것임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호메로스의 의도 안에서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댄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라면 한눈에 알아보았을 접목이다. 그 자신이 바로 이런 차용으로 평생의 업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에머슨 라틴은 해마다 가을 학기에 그의 《아이네이스》로 돌아간다. 라틴어 원문으로 읽고, 한 행씩 번역하고, 필수 구절은 물론 그해 반이 더 머물고 싶어 하는 대목을 두고 토론한다. 이번 학기에 학생들이 만날 이 시 자체가, 이 영화가 여름 내내 던져 온 바로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아스는 불타는 트로이에서 아버지 안키세스를 제 어깨에 업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의 가신(家神)들과 함께 빠져나온다. 그리고 시의 나머지 내내, 내려놓지 않고 몸으로 짊어진 기억이 있어야 무엇이든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놀런의 오디세우스는 다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칼립소의 망각 대신 기억을 택해야 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아스에게는 애초에 잊을 여유조차 없다. 아이네이아스를 아이네이아스이게 하는 덕목인 pietas는 죽은 이들과 신들, 그리고 그 둘에게 지고 있는 의무를 늘 마음에 붙들어 두는 훈련이다. 이 영화가 그리스의 언어로 던지는 문제에 로마가 내놓은 대답이다. 《아이네이스》의 앞 여섯 권은 일부러 《오디세이아》의 방랑을 되짚는다. 괴물은 괴물대로, 시련은 시련대로 하나씩 짝을 맞춘다. 그러고 나서 뒤의 여섯 권에서는 이탈리아 땅에서 《일리아스》의 전쟁을 다시 치른다. 영화 카메라가 이번에 영어와 IMAX로 호메로스에게 해 보려 한 일을, 처음으로 라틴어 육보격 시로 해낸 작품이 바로 이 시다. 가을 내내 그 구조 안에서 지내는 반은 말 그대로 그 시를 읽게 된다. 올해 영화가 호메로스를 어떻게 다루든, 베르길리우스는 2천 년 전에 이미 호메로스를 자기 방식으로 이어받았다. 에머슨 라틴이 지켜 가려는 것은 더 오래되고 더 어렵게 얻어 낸 그 계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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